국내 1호 개통 이성진씨
7월말 해외서 단말기 구입
전파연구소 직접 찾아가… 분해 시연하며 개인인증
인터넷에 사용 후기 올려… "IT 리더다" 네티즌 열광
지난 8월 17일, 서울 용산구 방송통신위원회 전파연구소에 노트북 배낭을 멘 30대 회사원이 나타났다. "아이폰 개통하러 왔는데요."전파연구소는 전파 연구도 하고 정보통신기기에 대한 품질 인증도 해주는 곳이다. 이날 연구소를 찾은 이성진(33)씨는 철강회사 직원이다. 결혼한 지 9년 된 아내와 방 세 개짜리 아파트(105㎡·32평)에서 7살부터 2살까지 4남매를 키운다.
얼핏 보기에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그는 노트북·PDA·스마트폰 최신제품에 열광하는 'IT 마니아'다. 10대 청소년이 아이돌그룹 신보에 애태우듯 이씨도 가슴 두근거리며 '신상'(새로운 상품)을 기다린다. 이 제품, 저 제품 사서 조금 쓰다 금세 내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여러 제품을 세밀하게 비교해 남들보다 몇 년씩 앞선 '비장의 신기술 기기'를 1년에 1~2개씩 마련하고, 열광하는 사나이다.
- ▲ 2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국내 아이폰 1호 개통자인 이성진씨가 아이폰을 통해 조선일보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여주고 있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이날 그는 미국 애플사에서 6월 9일 출시한 아이폰 3세대 휴대폰을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 배낭 속 노트북에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400쪽 분량의 아이폰 관련 자료가 저장돼 있었다. 아이폰 3세대는 출시 직후부터 전 세계에 '마니아' 집단이 형성된 제품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출시 계획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씨는 하염없이 때를 기다리는 대신, 7월 말 해외 인터넷 경매 사이트를 통해 아이폰 3세대를 105만원에 구입했다. 이어 전파연구소에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 쓸 수 있냐"고 문의했다.
전파연구소는 1990년대 중반부터 소정의 전파 시험을 거치면 해외에서 구입한 휴대폰을 국내에서 사용할 수 있게 인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전파연구소 관계자는 이씨에게 "아이폰은 법적으로 '휴대전화'가 아닌 '복합기기'"라며 "휴대전화는 10만원 정도면 전파인증 시험을 받을 수 있지만, 아이폰 같은 스마트폰은 다양한 영역별 시험을 합치면 총 2300만원쯤 든다"고 했다.
전파연구소 직원은 실망하는 이씨에게 "그렇지 않아도 비슷한 문의가 쏟아져 방법을 찾는 중이니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목요일인 8월 13일, 연구소 사이트에 '1인당 1대에 한해 30여만원에 전파 인증을 해주겠다'는 공지가 떴다. 이 공지를 보고 맨 먼저 찾아온 사람이 이씨였다. 공휴일인 8월 15일과 주말을 지나, 월요일이 되자마자 연구소에 나타난 것이다.
이날 이씨는 연구소 신영진(37) 주무관 앞에서 미리 내려받은 미국 연방통신위 자료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고, 직접 드라이버로 아이폰을 분해해 보였다. 9월 25일 드디어 인증서가 나왔다. 이씨는 "정확히 말하면 오후 3시 45분에 인증을 받아 4시 42분 국내 최초로 아이폰을 개통했다"고 했다.
전파연구소측은 "이씨가 '개척'한 길을 따라 지금까지 589명이 우리 연구소에서 아이폰을 개통했다"고 했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국내에 수입될 제품을 놓고, 이씨를 포함한 590명이 이처럼 공력을 쏟아부은 이유가 뭘까? 이씨는 "외국에선 쓰는데 우리나라에선 왜 못 쓰나 하는 반발감, 해외에선 이미 널리 퍼진 전화기를 나도 쓸 수 있다는 기대감이 함께 작용했다"고 했다.
"명품 사는 심리와는 좀 달라요. 돈을 많이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지난달 아이폰 3세대가 정식 유통되자 주위에서 '아쉽겠다'고 해요. 천만에요. 남들도 쓰게 돼서 더 기뻐요. 이 좋은 걸 나 혼자 누리는 건 의미가 없잖아요."
이씨는 1970년대 후반 이후 출생해 PC 보급과 함께 유소년기를 보낸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이다. 중1 때 아버지로부터 무지개색 사과가 그려진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물받은 게 시초였다. 학창시절 별명은 '소프트 빨대'. 갖은 방법으로 소프트웨어를 공수해온다는 뜻이다. 고3 때 본지가 주최한 '제1회 컴퓨터 꿈나무 선발대회'에서 특상을 타기도 했다. 당시 본지 인터뷰는 그를 '밥은 안 먹어도 컴퓨터 없인 못 사는 매킨토시 왕자'로 소개했다.
아이폰 3세대 개통 후, 그는 네티즌의 스타가 됐다. 그는 인터넷에 개통 과정과 사용 후기를 상세하게 올렸다. 이후 휴대전화·내비게이션 제조사 수십 곳에서 강연 요청이 쏟아졌다. LG전자 임원들 앞에서 아이폰의 강점을 설명하기도 했다. 네티즌은 그를 '선구자' '개척자'라고 부른다. 댓글을 통해 "국내 스마트폰 제조사들도 이처럼 열정적인 사용자가 있음을 알고 분발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문조(60) 교수는 "이씨 또래의 디지털 원주민들은 단순히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 신제품을 빨리 사용해보는 소비자)'를 부러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을 '존경'하고 도덕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연세대 경영학과 장대련(53) 교수는 "휴대전화 하나를 얻으려고 백방으로 뛴 스토리가 인터넷에 퍼지면서, 평범한 직장인이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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