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싹쓸이에 ‘5원’도 서로 갖겠다고…
등록 : 2012.08.11 12:30수정 : 2012.08.11 13:57
경기도 평택에서 고물상을 하는 정진영씨가 고물이 섞인 쓰레기 더미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고철을 구하지 못해 쓰레기 모으기에 나섰지만 그나마도 넉 달 동안 팔지 못해 계속 쌓여가고 있다. 서보미 기자 |
현대·포스코 철 스크랩 100% 회수하고
자체 수급하는 시스템 만들자 ‘고물 대란’
남의 밥그릇 넘보지 않던 ‘상도의’ 깨져버려
경기도 평택의 한 장례식장. 누군가 삶의 끝인 이곳에서 ‘고물상’ 정진영(52)씨의 하루는 시작된다. 간밤에 장례식장에서 나온 쓰레기들을 1t 트럭에 서둘러 담는다. 매일 쓰레기 봉지를 치워주는 대신 그 속에 섞인 폐지며 알루미늄캔 따위 고물을 얻는다. 아침부터 폭염의 기세가 사납지만, 청소 아줌마의 쉴 새 없는 잔소리와 조문객들의 따가운 시선에 더 열이 난다. 땀이 뚝뚝 떨어져도 푹 눌러쓴 모자는 한 번도 고쳐 쓰지 않았다. 1시간 만에 일을 마친 그가 돌아보며 말했다. “인생이 참 서글프다”고.
20일도 안 걸렸을 걸 두 달 만에
그는 기층 고물상(소상)이다. 고물 생태계에서도 밑바닥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모아온 물건들을 받아주고, 작은 공장이나 건설 현장으로 직접 고물을 떼러 다닌다. 그도 쓰레기에서 돈이 안 된다는 걸 안다. 넉 달 동안 팔아본 적도 없다. 묵직한 고철을 맘껏 주으러 다니고 싶다. 그러나 3~4개월 전부턴 고철 씨가 말랐다. 지난 두 달간 고철 5t을 모아 30만원을 남겼다. 예전 같았으면 20일도 안 걸렸을 물량이다. 곧바로 수입이 줄었다. 직원도 없이 아내 김상미(52)씨와 둘이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지만, 지난봄부터는 한 달에 300만원을 못 맞출 때도 있다. 지난해 450만원 벌이에서 반으로 떨어졌다. 가게 임대료와 유지비를 빼면 150만원 남는다. 지난 6월엔 하루벌이를 위해 건설 현장에 나갔다 무릎에 금속이 박혀 수술도 했다. 그래도 그는 2년 전 남 울리는 채권추심업계를 떠나 정직하게 돈 버는 고물업계에 들어선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경제의 밑바닥 고물업계가 또다시 위태롭다. 타들어가는 한여름에도 고물업계는 찬바람이 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고 온 ‘고물 대란’ 이후 3년 만이다. 아직은 버틸 만하지만, 속도가 빠르다. 고철·폐지·알루미늄·구리 할 것 없이 시장에 물건이 안 돌고, 가격은 내리고 있다.
그때처럼 경기둔화가 고물업계 한파의 직접적 원인이다. 경기가 위축되자 살아 있는 경기 지표인 고물 유통시장도 쪼그라들고 있다. 그중에서 건설·산업 자재를 만드는 고철(철 스크랩)은 경기에 민감하게 움직이고 있다. 고물 중간 판매업자인 중상이 정씨 같은 소상에게 쳐주는 고철값(경량A)은 8월 초 kg당 390원까지 떨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말 100원대보다는 높지만 경기가 어느 정도 회복된 지난해 2월 480원보다는 100원 가까이 떨어졌다. 그땐 상품이면 500원 중반도 받았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고물상들에게 더 중요한 건 물량이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유통단계별로 고철 마진이 kg당 10~20원이다. 소상이 공장에서, 중상이 소상에게서, 대상(소비자에게 납품)이 중상에게서, 고철의 목적지인 제강·제철업체가 대상에게서 물건을 받을 때 마진이 모두 그 정도다. 오고 가는 고물이 많으면 가격이 낮아도 크게 손해는 보지 않는다.
이번에도 급격히 줄어드는 고철 유통 물량이 속을 썩이고 있다. 올해 들어 건설 현장이나 공장에서 나오는 고철이 줄어들자 제강업체들이 고철 수입을 늘려 물량을 확보했다. 그러나 철근 등 제품 수요가 줄어 재고가 쌓였고, 제강업체들은 국내 고철 구매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56만t이던 고철 수입량은 지난 6월 말 84만t까지 늘어난 반면, 국내 고철 구매량은 지난해 10월 166만t에서 141만t으로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물상들은 물량을 확보하려고 제살깎기식 출혈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경기도 파주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권아무개씨는 “예전에는 물건을 받아오면 10~20원의 마진을 남겼다. 그런데 요즘엔 5원만 돼도 받는다. 부가세 같은 세금을 빼고 나면 오히려 적자다. 그래도 돈이 안 된다고 거래처에 너무 짜게 값을 쳐주면 나중에는 물건을 아예 못 받는다. 이 정도라도 받아가려는 고물상들이 널렸다”고 말했다.
개별 업체→중상·대상→제강업체 구조 깨져
고물 대란 후유증도 크다. 대형 제강업체들이 철 스크랩 수급 불안을 겪은 뒤 달라졌다. 최종 소비자에 머물렀던 제강업체들은 자체 수급 시스템을 만들었다. 국내 최대 고철 소비자인 현대제철이 대표적이다. 현대제철은 2~3년 전부터 현대·기아자동차그룹 계열사는 물론 협력업체에서 나온 철 스크랩을 직접 공급받고 있다. 예전엔 개별 업체들이 각자 알아서 고철을 중상·대상에 팔면, 고철은 여러 제강업체로 흘러들었다. 변화의 계기는 2010년 일관제철소 준공이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이때 ‘자원순환형 제철소’를 선언했다. 예컨대 현대·기아차에서 나온 고철을 전기로에서 녹인 뒤 철근으로 만들어 그룹 내 건설자재 등으로 재활용하는 구조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과 관련해 나온 고철은 유통시장에서 거의 머물지 않고 곧바로 회수되는 것이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고급 철 스크랩의 사용량이 늘어 (고철) 납품업체들이 자동차 부품업체의 철 스크랩 구매를 늘려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 제강업체들이 2008년 ‘고철 대란’을 겪은 뒤 안정적으로 물량을 확보하려고 계열사·협력사에서 나온 고철을 끌어모으고 있다. 한 제강업체 직원들이 고로에서 쇳물을 만드는 모습. 윤운식 기자 |